특히 새해 축제 분위기에 휩싸여 있을 때면, 100여 년 전 12월 하순 어느 날 아침, 호세 리살이 놀라울 정도로 침착한 모습으로 처형장으로 향했다 는 사실을 잊기 쉽습니다 . 폭력적인 봉기를 믿지 않았던 그가, 단지 자신의 신념을 배신하기를 거부했다는 이유만으로 폭력적인 최후를 맞이했다는 것은 참으로 충격적인 장면입니다.
하지만 그 나라 역사의 흐름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사형 집행 그 자체가 아니라 그의 삶과 업적이었다.
12월 30일 리잘 기념일은 이제 달력에서 그저 흔한 기념일 중 하나로, 국민들이 가장 좋아하는 휴일들 사이에 편리하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리잘이라는 인물 자체는 아득한 신화 속으로 사라졌고, 많은 필리핀 사람들은 그가 진정으로 상징하는 바에 무감각해졌습니다. 하지만 물론, 어떤 이들에게는 그 덕분에 또 하루 유급 휴가를 얻고 늦잠을 자며 보고 싶었던 드라마를 몰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합니다.
게다가, 일상생활도 이미 충분히 힘든데 누가 19세기 인물에 신경 쓸 기력이 있겠어요?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 점 때문에 리잘의 삶과 죽음이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 순간의 주인공
리잘은 우연히 죽음을 맞이한 것이 아닙니다. 처형되기 몇 달 전, 카티푸난은 그를 다피탄 유배에서 구출해 주겠다고 제안했습니다. 안드레스 보니파시오는 그에게 혁명을 이끌어 달라고 요청하기도 했지만, 그는 모두 거절했습니다.
그의 추론은 지나치게 실용적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는 자원 부족으로 인해 자국민들이 본격적인 봉기를 일으킬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며, 그러한 행동은 불필요한 유혈 사태로 이어질 뿐이라고 믿었습니다.
리잘과 카티푸난은 서로 다른 방향에서 자유를 추구했지만, 궁극적으로는 같은 목표를 향해 나아갔습니다. 리잘은 개혁을 통해 해방을 추구했고, 카티푸난은 혁명을 통해 독립을 추구했습니다.
혁명에 영감을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리잘은 1986년 12월 15일에 작성한 선언문에서 이를 공개적으로 비난하며 다음과 같이 선언했습니다. "나는 이 봉기를 강력히 규탄합니다. 이는 우리 필리핀 국민에게 불명예를 안겨주고 우리의 대의를 옹호할 수 있는 사람들의 신뢰를 떨어뜨립니다. 나는 이 봉기의 범죄적인 방법을 혐오하며, 어떠한 가담도 하지 않았음을 분명히 밝힙니다. 또한, 속아서 이 봉기에 참여한 순진한 사람들을 진심으로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리잘이 체제 내 개혁을 간절히 바랐던 와중에도, 선전 운동은 스페인으로부터의 분리가 불가피하다는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데 일조했다.
역사가 레나토 콘스탄티노는 1972년 에세이 「이해 없는 숭배 」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 "선전 활동은 필리핀인을 스페인에 더 가깝게 만들기는커녕 분리주의를 뿌리내리게 했다. 스페인화 추진은 독자적인 민족의식 형성으로 이어졌다."
리잘은 자신과 가족의 경험을 통해 억압을 누구보다 잘 이해했지만, 콘스탄티노는 그를 "한계적인" 필리핀인으로 묘사하며 "그는 국가 통합을 위해 싸웠지만 혁명을 두려워했고, 조국을 사랑했지만, 그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사랑했던 지식인 필리핀인 "이라고 설명했다.
리잘은 오랫동안 스페인과의 동화가 가능하고 바람직하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유럽의 예술, 문화, 그리고 자유주의 사상을 동경했지만, 반복되는 인종차별과 불의는 그의 삶에서 그러한 믿음에 점차 균열을 일으키게 했습니다. 가족이 토지를 임대해 주던 도미니크회 수도사들과의 칼람바 토지 분쟁으로 압박을 받던 시기에, 리잘은 동화의 실패를 인정하며 1887년 블루멘트리트에게 보낸 편지에서 "필리핀 사람들은 오랫동안 스페인화되기를 바랐지만, 그것은 잘못된 열망이었다"라고 썼습니다.
콘스탄티노의 말처럼 리잘은 "움직임 없는 의식"이었을지 모르지만, 그 의식은 중요했고, 혁명은 그 각성을 행동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콘스탄티노는 “사회 평론가로서, 억압을 폭로하는 사람으로서 그는 놀라운 업적을 남겼다. 그의 저술은 혁명과 분리주의 운동으로 발전한 저항의 전통의 일부였다. 원래 그의 목표는 원주민을 스페인화의 수준으로 끌어올려 스페인에 동화시키고, 이 나라를 스페인의 한 주로 편입시키는 것이었지만, 결국 정반대의 결과로 이어졌다”라고 썼다.
리잘이 없었다면 혁명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요?
리살은 1896년 마닐라의 루네타 공원으로 알려진 곳에서 스페인군의 방아쇠가 당겨졌을 때 쓰러졌지만, 그보다 더 큰 의미가 있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의 처형은 분리 독립에 대한 민중의 열망을 더욱 고조시켰고, 서로 다른 운동들을 하나로 묶었으며, 혁명에 도덕적 명확성을 부여했습니다.
하지만 리잘이 없었더라도, 그 봉기는 일어났을지도 모릅니다. 다만 훨씬 더 파편화되고, 덜 일관성이 있으며, 덜 확고한 형태로 말이죠.
그의 삶과 죽음은 체계적인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그가 순교를 추구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이상을 배신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죽음은 애국심을 키우는 비결이 아니다.
역사가 암베스 오캄포는 그의 저서 『외투 없는 리잘』 (1990)에서 리잘의 불안할 정도로 침착한 모습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리잘은 조용하고 평화로운 사람이었으며, 자신의 신념을 위해 기꺼이 그리고 침착하게 죽음을 향해 걸어갔습니다. 처형 직전 그의 맥박은 정상이었다고 전해집니다. 만약 죽음을 피할 수 있다면 자신의 신념을 위해 기꺼이 죽음을 택할 사람을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오캄포는 리잘을 "의식 있는 영웅"이라고 부르는데, 그 이유는 리잘이 자신의 결정에 신중했고 그 결과를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리잘은 1982년에 쓴 편지에서 자신이 왜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았는지 설명했습니다. "더욱이 저는 우리에게 애국심을 부정하는 자들에게 우리가 의무와 신념을 위해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 알고 있음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사람이 죽는다면 죽음이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조국과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죽는다면 무엇이 중요하겠습니까?"
오늘날 우리는 리잘에게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요?
오늘날 리잘은 종종 미국이 후원한 성스러운 영웅으로 기억됩니다. 실제로 그의 현재 유산은 부분적으로 미국의 식민주의적 서사에 의해 형성되었습니다. 시어도어 프렌드는 그의 저서 『두 제국 사이』 에서 리잘이 미국에게 선호된 이유는 "아길날도는 너무 호전적이었고, 보니파시오는 너무 급진적이었으며, 마비니는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콘스탄티노는 더욱 직설적으로 “그들은 미국의 식민 정책 기조에 어긋나지 않는 영웅을 선호했다”라고 썼다.
하지만 '국가 영웅'은 공식적인 헌법적 칭호가 아니며, 리잘에게는 그러한 칭호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의 업적은 그 자체로 충분히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나 리잘을 신격화하기보다는 인간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필리핀 국민들이 다음과 같은 더 나은 질문을 던질 수 있도록 해줍니다. 그의 모범 중 어떤 부분이 여전히 유효한가? 어떤 부분은 그렇지 않은가?
콘스탄티노는 그의 저서 『우리의 과제: 리잘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 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 "리잘의 개인적인 목표는 언제나 그가 생각하기에 국가의 이익에 가장 부합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리잘을 무의미하게 만든다는 말은 부패와 불의가 만연한 한 리잘의 모범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뜻입니다. 그러한 이상이 진정으로 실현되면 그의 유산은 제 역할을 다한 것이며, 양심을 일깨워줄 상징적인 영웅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분명 그런 상황과는 거리가 멀다. 리잘이 자신의 이상을 배신하지 않았던 것처럼, 오늘날 필리핀 국민들도 부패와 불의가 주는 유혹과 압력에 맞서 굳건히 버텨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오래도록 기억될 교훈일 것이다.
12월 30일, 온 나라는 리잘이 어떻게 죽었는지뿐만 아니라, 더 중요하게는 왜 그가 스스로를 구하지 않았는지 기억합니다.

리잘 기념일을 맞아 마르코스 대통령이 필리핀 국민들에게 "개인적 이익보다 국가를 우선시하라"고 촉구했습니다. PNA 2025년 12월 30일 오전 8시 45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