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북부 루손주 걷는 시간》29화/30화

필리핀《북부 루손주 걷는 시간》29화/30화



《북부 루손주 걷는 시간》

제29화 - 투게가라오(Tuguegarao)를 떠나 산티아고(Santiago)로 가는 긴 여정길

2024년 7월 29일, 아침
눈을 떴을 때, 시계는 이미 아침 8시를 훌쩍 넘기고 있었다.
‘앗, 망했다.’
내가 평소보다 늦게 일어난 건, 투게가라오라는 도시가 주는 묘한 평온 때문이었을까.
햇살은 이미 창문을 넘고 있었고, 머물던 숙소 주인 아주머니의 목소리는 멀어지고 있었다.

서둘러 배낭을 메고 문을 나섰다.
고작 이틀을 머물렀을 뿐인데, 이상하게 정든 공간.
"다음에 또 와요!"
아주머니의 목소리는 짧고 밝았지만, 마음 어딘가를 묘하게 찔렀다.
아쉽게 손을 흔들며, 바쁘게 발걸음을 옮긴다.

버스터미널에 도착했을 땐, 마치 영화처럼.
버스는 바로 눈앞에서 출발해버렸다.
기억보다 빠른 출발, 혹은 나의 느림.
어쨌든 떠난 건 떠난 거였다.

아침도 못 먹은 터라 근처 포장마차에서 급하게 삶은 계란 하나와 팬데살을 샀다.
커피는 진한 블랙 대신 설탕 잔뜩 들어간 인스턴트 믹스커피.
그 순간, 그것도 꽤 괜찮았다.

버스를 다시 기다리는 시간.
사람들은 각자의 표정을 안고 앉아 있었다.
누군가는 무표정했고, 누군가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눈빛이었다.
나는 그냥... 잠시 이 도시를 떠나지 않은 듯 앉아 있었다.
‘기다림은 익숙하다. 그러지 뭐...’
스스로에게 중얼이며, 다시 가방의 끈을 조정해 본다.

길 위에서
드디어 산티아고 행 버스가 도착했고, 출발했다.
도로는 강을 따라 굽이쳤고, 낮은 산들이 천천히 모습을 바꾸며 창밖으로 스쳐 갔다.
풍경은 말이 없었지만, 어떤 위안을 주는 듯했다.

버스 안, 옆자리에 앉은 건 교복을 입은 고등학생이었다.
나를 흘깃 보더니, 용기를 내어 말을 걸었다.
"Are you Korean?"
"Yes, I am."
"Wow... I like Korean dramas."

그 말에 웃음이 나왔다.
우리는 간단한 영어로 대화를 이어갔다.
그는 꿈이 선생님이라고 했고, 나는 그 꿈을 응원했다.
잠시 후, 그는 창밖을 보며 조용해졌고, 나도 입을 다물었다.
그저 함께 달리는 풍경과 이야기만이 머릿속에 떠다녔다.

산티아고 도착
도시의 분위기는 투게가라오와는 사뭇 달랐다.
덜 복잡하고, 어딘가 더 정적이었다.
작은 숙소를 찾아 체크인을 하고, 짐을 풀었다.
숙소 주인은 조용한 사람이었고,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묻지도 않았다.
그게 오히려 편안했다.

해가 질 무렵, 시내를 조금 걸었다.
시장 골목에서 숯불에 구운 바비큐 냄새가 풍겼고, 나는 참지 못하고 하나 집었다.
작은 식당에 앉아 산미겔 맥주 한 병을 주문하고, 고기와 함께 천천히 씹었다.
달큰한 간장 소스가 입 안에 감돌았다.
그 순간, 하루의 여정이 모두 정리되는 듯했다.

맥주를 다 비우고, 숙소로 돌아왔다.
샤워를 하고, 선풍기를 켜고 누웠을 때
문득 생각했다.

‘원래는 바나우에를 갈 계획이었지.’
하지만 오늘, 계획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그날 머물고 싶은 곳에 머무는 것.
그것이 지금의 내 여행 방식이었다.

눈이 감기며 속삭이듯 되뇌었다.
“오늘도 잘 살았어.”


《북부 루손주 걷는 시간》

제30화 - 산티아고, 나를 놓는디...

2025년 7월 30일 오전부터 ~ 8월 4일 저녁까지
4박 5일, 조용한 도시에서 나를 내려놓다


Day 1: 7월 30일 - 도착, 낯선 골목, 처음 마주한 평온

산티아고에 도착한 건 이른 아침이었지만, 도시의 움직임은 느렸다.
버스터미널은 생각보다 소박했고, 택시보다 삼륜 바이크의 존재감이 강했다.
짐을 메고 터벅터벅 걷다가, 우연히 골목 안쪽의 작은 게스트하우스를 발견했다.
“방 있어요?”
노인의 얼굴엔 세월이 잔잔히 흘러 있었고, 나를 바라보는 눈빛엔 환영과 의심이 교차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방 열쇠를 건네주며 말했다.
“도시가 조용하죠. 천천히 둘러보세요.”

그 말처럼, 산티아고는 마치 오래된 필름 같았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많지 않고, 간판도 하나같이 옛스럽고 빛바랜 느낌.
하지만 그 속에서 살아있는 생명 같은 정적이 있었다.

나는 먼저 근처 시장으로 향했다.
맨발로 앉아 파파야를 깎던 아주머니, 생선 냄새와 비닐의 마찰음,
그리고 옥수수를 찌는 큰 솥에서 피어오르는 증기.
모든 것이 낯선데 따뜻했다.
점심은 단순하게 치킨인아살과 갈릭라이스.
입안에 퍼지는 마늘 향과 달콤한 간장이 이 도시의 첫 인상과 닮아 있었다.

그날 저녁, 숙소 근처에서 맥주를 마시며 노을을 바라봤다.
하늘은 선홍색과 회색이 섞인 오묘한 빛깔.
‘오늘 하루도 잘 버텼다.’
혼잣말은 맥주보다 더 쓸쓸했지만, 묘하게 편안했다.


Day 2: 7월 31일 - 외곽 마을, 강가에서 만난 침묵

둘째 날 아침, 나는 삼륜바이크를 타고 도시 외곽의 작은 마을로 향했다.
이동하는 내내 양옆은 논밭이었다.
물길이 흐르는 둑길을 따라가다 보니, 작은 나무다리를 건너는 아이들과 마주쳤다.
그들은 내게 손을 흔들며 웃었고, 나는 카메라 대신 눈으로 그들을 찍었다.
"Where are you going, kuya?"
"Nowhere. Just... anywhere."

마을 근처에는 작은 강이 있었다.
강가에 앉아 물수제비를 던지며 한참을 보냈다.
그곳엔 말이 필요 없었다.
물소가 천천히 지나가고, 그 위에 아이가 타고 있었다.
강물 위로 햇살이 반짝였고, 잠시 세상은 멈춘 듯했다.

점심은 마을 어귀의 노점에서 먹은 라면과 삶은 계란.
무척 단순했지만, 그날처럼 배부른 식사는 드물었다.
돌아오는 길엔 이름도 없는 성당을 하나 발견했다.
문이 열려 있었고, 안은 텅 비어 있었다.
나는 조용히 들어가서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눈을 감았다.
기도는 아니었지만, 내 안의 무언가가 고요해졌다.


Day 3~4: 8월 1~2일 - 뜻밖의 바나우에, 녹색 절벽에 취하다

예상치 못한 충동.
산티아고에서 멀지 않은 바나우에(Banaue)까지 당일치기 여행을 감행했다.
버스를 타고 굽이굽이 올라가는 길.
창밖의 풍경은 어느새 논과 산, 그리고 하늘만으로 채워졌다.
“이게 진짜 숨막히는 풍경이지.”
그 말밖엔 할 수 없었다.

계단식 논, 안개 낀 절벽, 그리고 산허리에 걸쳐 앉은 고요한 마을들.
하늘이 가까운 듯했고, 나는 아주 작고 가벼운 존재였다.
현지 가이드를 따라 간단한 트레킹을 하며,
논 사이에서 잠깐 쉬는 아이들과 대화도 나눴다.
그들에겐 이 풍경이 '일상'이지만, 나에겐 마치 기억 너머의 장소 같았다.

산에서 내려와 작은 카페에서 마신 핫초코는
진하고 묵직했다.
나는 그 맛을 천천히 씹었다.
그날 밤 산티아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엔, 피곤함 대신 이상한 활력이 느껴졌다.
"오늘, 참 잘 떠났다."


Day 5: 8월 3~4일 - 산티아고로 돌아와, 느리게 걷기와 작별

여행의 마지막 이틀은 산티아고 시내 골목을 느리게 걷는 데 썼다.
낮에는 오래된 가게를 기웃거리고,
밤엔 같은 맥주집에서 같은 자리, 같은 잔으로 마무리를 했다.

하루는 어느 청년이 다가와 나를 보며 말했다.
“Kuya, you’ve been here a while now.”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Yeah. I needed to stop.”
그는 이해한 듯, 혹은 이해하지 못한 듯 고개를 끄덕이고 사라졌다.

8월 4일 저녁.
짐을 꾸리며 방을 둘러봤다.
작은 방, 낡은 선풍기, 흐릿한 전등 불빛.
하지만 나는 이 방을 좋아하게 되었다.

숙소 주인에게 인사를 하고 나올 때, 그는 짧게 말했다.
“Take care. Maybe you come back.”
나는 천천히 웃으며 말했다.
“Yes. Maybe.”

그렇게 나는 다시 길 위로 나섰다.
다음 목적지는 아직 모른다.
하지만 산티아고는 분명히 말했다.

“천천히 가라. 아직 너를 놓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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