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부 루손주 걷는 시간》
21화 - 비간에서 라오그(Laoag) 가는 길
📆 7월 2일
비간을 떠나는 아침, 여전히 바쁘고 정신이 없었다. 대충 배낭을 메고 거리로 나섰고, 푹푹 찌는 아침 공기를 지나 터미널로 향했다.
줄을 잘못 섰던 탓일까? 그녀와 마주쳤고, 우리는 우연히 같은 버스를 탔다.
버스비를 내주며 그녀는 웃었다.
"오늘은 내가 쏠게요. 대신 저녁밥은 당신 차례."
길고 낡은 버스는 덜컹이며 북쪽으로 달렸다.
창밖은 필리핀의 전형적인 시골 풍경. 논과 물소, 헛간 같은 집들, 그리고 군데군데 서 있는 산티아고 조각상.
버스 안에서 우리는 계속 수다를 떨었다.
"전 원래 회사원이었어요. 일본계 기업. 하루 종일 엑셀 시트랑 싸우는 인생."
"그럼 왜 떠났어요?"
"엑셀이 내 인생을 지배할까 봐요."
그녀는 정색했다가 웃었다.
"농담 아니에요. 3년간 매일 야근하고, 주말엔 회사 워크숍. 어느 날 출근하다가 가로수 보고 울었어요. 너무 예뻐서가 아니라, 나보다 자유로워 보여서."
그 말에 나도 웃었다.
"그럼 여행은 도피인가요, 자유인가요?"
"음… ‘업데이트’요. 내 인생 운영체제 업그레이드 중."
라오그에 도착한 후, 우리는 숙소를 정하고 근처 푸드코트 같은 식당으로 향했다.
전등은 형광등이었고, 팬은 삐걱댔지만 음식은 제법 괜찮았다.
간장 바른 바비큐, 칼라만시 뿌린 팬싯, 바삭한 튀김과 시원한 산미겔 라이트.
밥을 먹으며 그녀는 이야기를 이어갔다.
"사실 나, 여행 오기 전엔 결혼 생각도 했어요. 남자친구랑 4년. 근데 어느 날… 우리가 커플이 아니라 공동 CEO처럼 느껴지더라고요. 같이 행복을 경영해야 하는 느낌?"
"그거… 엄청 피곤했겠어요."
"그래서 내가 먼저 이사회에서 탈퇴했죠."
그녀는 맥주 한 모금 마시고 고개를 들었다.
"이젠 그냥, 나랑만 잘 지내보려고요. 나라는 사람과 평화조약 맺는 중."
나는 아무 말 못 했다. 그 말이 너무 좋았다.
우린 또 웃었다.
옆 테이블에선 현지 청년들이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낯선 멜로디였지만, 왠지 어깨가 흔들렸다.
"나, 이런 순간이 너무 좋아요." 그녀가 말했다.
"약간, 내가 인생에서 벗어난 느낌. 근데 더 진짜 같은."
"어쩌면… 여기가 현실이고, 우리가 떠나온 곳이 꿈일지도요."
저녁 식사가 끝나고 우리는 각자의 방으로 들어갔다.
"오늘 하루, 저장 완료."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손을 흔들었다.
나는 창가에 앉아 천천히 창밖을 바라봤다.
가로등 불빛 아래 지나가는 그림자, 바람 소리, 그리고 그녀의 웃음소리.
잠깐 함께 걷는 여행, 그 안에 담긴 누군가의 인생 조각.
《북부 루손주 걷는 시간》
22화: 라오그, 그녀와 보낸 5박 6일
7월 3일 – 첫 아침, 라오그
낯선 방. 선풍기의 소리는 익숙하지 않지만 이상하게도 편안했다. 아침 햇살이 커튼 사이로 스며들던 그 순간, 맞은편 방에서 그녀가 나왔다. “좋은 아침이에요.” 수줍은 미소. 어제는 그저 같이 버스를 탔을 뿐인데, 오늘은 여행의 동반자가 되어 있었다.
아침은 근처 카렌데리아에서 시니강과 토실로그. 그녀는 고춧가루를 찾고 있었고, 나는 물티슈를 찾았다. 엇갈린 취향, 그러나 나란히 앉은 풍경.
우리는 라오그 시내를 걸었다. 거리에는 오래된 스페인풍 건물이 섞여 있었고, 트라이시클 기사들의 웃음소리가 태양보다 먼저 우리를 덮었다. 점심 무렵, 그녀는 말했다.
“한국에서 여행은 일정표에 쫓기는 느낌인데, 여기선 그냥… 살아지는 느낌이에요.”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이 여행은 이미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7월 4일 – 파오아이, 먼지와 햇살의 교회
우리는 파오아이 교회를 향했다. 산 페르난도 바람처럼 불어오는 태양 아래, 그녀는 모자를 푹 눌러쓰고 말했다.
“이렇게 큰 교회를 사람들이 맨손으로 지었다니… 믿어지지가 않아요.”
그녀는 오랫동안 교회 앞 벤치에 앉아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과거의 어떤 사람을 기다리는 사람 같았다.
점심은 ‘에mpanada’. “이 안에 다 들어있네, 인생처럼.”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삶으로 흘렀다.
“대학교 때 필리핀 와서 봉사활동 했어요. 그때 봤던 사람들, 얼굴 잊히질 않아요.”
그녀의 눈빛에 진심이 묻어 있었다. 나는 그 순간, 여행이란 장소보다 사람이 만든다는 걸 깨달았다.
7월 5일 – 방기 풍차, 그리고 끝없는 수평선
그날은 먼 길이었다. 방기 풍차까지 가는 길은 울퉁불퉁했지만, 그녀는 창밖으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저 풍차는 그냥 풍경이 아니에요. 사람들한테 희망이에요. 발전도 되고, 사진도 찍고, 기억도 남고.”
우리는 작은 바위에 앉아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바람은 우리 옆을 스쳐 지나갔고, 대화는 멈췄다.
“언젠가, 다시 와야겠죠?”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그땐 혼자 말고.”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7월 6일 – 카프 보헤도르 등대, 침묵의 순간
등대로 가는 언덕길에서 그녀는 숨을 헐떡였다.
“여기까지 오니까 뭔가… 인생 정리하는 기분이네요.”
등대 꼭대기에서 내려다본 풍경은 말 그대로 ‘넓었다’. 그리고 조용했다.
그녀는 오래도록 무언가를 썼다. 다이어리일까. 일기일까. 편지일까.
“저는 여행하면서 이 시간이 제일 좋아요. 아무 말도 안 해도 되는, 그런 순간.”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냥 옆에 앉아 바다를 보았다. 그리고 그 조용함이… 좋았다.
7월 7일 – 라오그, 돌아온 골목
우리는 다시 라오그 뒷골목을 찾았다. 7월 2일, 처음 만나고 다시 만난 그 거리.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같은 골목, 같은 타일, 같은 카페… 그런데 걷는 느낌이 다르다.
그녀는 손으로 골목 벽을 쓰다듬었다.
“사람은 같은 곳을 다시 가도, 마음이 달라지면 전혀 다른 풍경이 되네요.”
점심은 로컬 음식점에서. 라파즈 바치oy에 사간, 그리고 망고 쉐이크. 그녀는 망고에 빨대를 꼽으며 말했다.
“이런 여행…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나는 그 말에 무심코 대답했다.
“사람 마음은… 쉽게 끝나지 않더라구요.”
7월 8일 – 라오그의 마지막 밤
짐을 싸는 소리는 슬펐다. 아무 말 없이 각자의 가방을 정리했다.
저녁은 조용한 식당에서.
“이제 또 혼자 남는 여행이네요.”
그녀는 맥주잔을 들었다.
“이렇게 누군가랑 같이 걷는 여행이, 나한텐 처음이었어요.”
나는 젓가락으로 마지막 조각을 집었다.
“그리고 마지막이 아니길 바래요.”
터미널까지 걷는 길, 등 뒤로 해가 졌다.
“다음에 또 만날까요?”
그녀가 물었다.
“우리, 이미 마음속에 있잖아요.”
나는 그렇게 대답했다.
필리핀 북부 루손, 라오그에서 보낸 여섯 날.
그 여행은 장소보다 사람을, 풍경보다 마음을 남겼다.
